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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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중견 여류수필가 권남희의 새 수필집『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
 안재동  | 2008·09·13 14:06 | HIT : 3,590 | VOTE : 251

그 방에 물사발은 우연히 있었던 걸까. 어머니 의중을 몰라 지금도 가끔 시험에 들고 마는 자신을 본다. "하루 종일 있어도 물사발이 그대로 있었다니까." 돌잡이 아기를 방안에 두고 바깥일을 보러 나가야 하는 어머니는 뜰먹대다 울먹이는 아기 주저앉히는 언변을 구사했으리라. (중략) 아버지가 어머니 앞으로 날리던 국대접이나 동댕이쳐지는 물사발로부터 받은 공포로 아기의 삶은 충분히 자지러져버린 후였다. "하루 종일 방안에 뒀는디, 물대접도 걍 그 자리에, 쟈도 그 자리에 있었당게로, 무슨 애기가 부처님맹기로 꿈쩍않는단 말여?" 부처님은 몰라도 여자아이는 어쨌든 부처님과 겨룰 만큼의 미덕을 갖춰야 성품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온화하고 조용한 품성에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 물사발부터 집어던지지 않는 진중함을 갖춰야 했다.(중략) "야가 갸여?" 나와 물사발 이야기는 전설처럼 동네를 떠돌고 친척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돌담도 토담도, 꽃담도 대문까지 없는 곳, 외딴 집의 아이는 온통 꽃살문 밖으로, 길가 어디쯤으로 귀를 기울이며 그저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집 주위를 에워싼 배추꽃, 무꽃, 오이꽃, 호박꽃, 토끼풀꽃, 탱자꽃이 아무리 향기를 드높여도 그들에게 '예쁘구나' 말 한 번 건네줄 줄 모르고 바라보기만 하는 아이였다.
―<물 한 사발에 시험 들었던 아기>

중견 여류수필가 권남희 씨가 새 수필집 『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문학관books 刊) 을 냈다. 앞에 적은 글은 책 머리말에 나오는 대목이다. 짧은 글이지만 긴 소설 같기도 하다.
낯설지 않은 가부장제 풍경, 가정이란 지붕 아래서 일상 완력으로 가족 앞에 서는 한 남성 가장의 모습이 쉬 떠오르면서 작가의 성장과정, 어쩌면 오늘이 있기까지 정서를 무겁게 지배하고 있던 그 무언가가 감지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넘어 가기에 앞서, 읽는 이로 하여금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글이다.

어쨌거나, 권 작가는 남달리 아픈 내력 하나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삶의 가치와 영혼의 지배요소 혹은 일탈욕구에 해당될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그것이 지배요소와 일탈욕구 사이에서 당차게 여문 과일 같은 글이 되어 쏟아져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바뀌어 국대접 날려버리고 물사발 내던지던 남정네들이 사라졌다. 마음속에서 두려움도 사라진지 오래지만 나는 아직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삶이 소들소들해 보이면 어떠랴. 물 한 사발과 대치한 덕분에 책을 친구 삼고 글을 쓰게 되어 인생이 풍성해지는 것”이라며 권 작가가 이어 밝히듯….

아픔은 아픔대로 무언가를 잉태하기 마련인 법, 그래서 그녀에게도 결국 그녀 자신만의 '특별한'(?) 물사발이 생긴 건 아닐까. 다만, 그것은 ‘약자에게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목마른자에게 전하는 배려'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총 293쪽으로 엮어진 이 책에는 Claude Monet의 <자화상>(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과 Camille Pissarro의 <몽마르트 거리의 야경>(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Paul Cezanne의 <성 안토니오의 유혹>(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등 무려 59편의 세계적 명화가 담겨 있다. 고해상도 컬러로 인쇄되어 원본을 연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수록된 에세이로는 <죽어도 사는 곰솔나무>, <일그러진 소녀 영웅>, <시간도 화석이 된다>, <숟가락 하나 더 놓았던 세상>, <서른 인생의 굿판>,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방법> 등 모두 48편인데, 명화와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명화 속의 에세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 에세이 속의 명화라고 해야 옳을지, 좌우간 독특한 감흥이 인다.

이런 연유는 "책갈피에 꽃잎 재워 놓듯 그림들을 글 갈피갈피 끼워 넣었다. 화가의 꿈, 그 이루지 못함을 보상하듯 그림 보기를 즐겨하다 수필집에 동승을 부탁했다. 글과 함께 기억의 재생고가 된 그림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글과 그림이 울타리를 넘나들고 초록은 동색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맞장구를 친다. 화가들이 그림으로 표현했던 옛날이나, 하이테크로 무장한 이 시대나 크게 달라질 게 없는 반복의 일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이 빛나도록 알아주는 내가 있기에 늘 새롭게 탄생하지 않을까."라고, 권 작가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피천득 선생은 <수필>이란 작품을 통해 "수필(隨筆)은 청자연적(靑瓷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淸楚)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女人)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平坦)하고 고요한 길이다."라고 밝힌 적도 있으나, 권 작가의 붓은 세상풍경에 많이 닿아 있는 듯하다. <버림받는 일이 없는 세상>, <‘내 남자의 여자' 드라마에 대한 분분함>, <귀순자와 탈북자>, <김승연 회장 폭력>, <조승희 총기 난사>, <작가의 하루>, <일그러진 소녀 영웅>, <창문으로 보는 인생> 등에서 특히 다분하다.

사람은 마음이 약해지면 자꾸 누군가에게 기대려 한다. 그러나 기대면 기댈수록 자신은 더 약해지고 타인들은 그것을 약점으로 잡는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해결과 도움은 달콤하지만 어느 순간 털고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홀로 서기가 힘들어진다. 그냥 견디면서, 내면에 굳은살을 만들어야 한다. 굿은 나 홀로 내 자신을 물어뜯고 할퀴어 난 상처를 보면서 실컷 아파하고 눈물을 흘려야 진짜 굿이라고 생각한다. 내 삼십대가 굿판 그 자체였다.
― <서른 인생의 굿판> 부분

<서른 인생의 굿판>의 경우, 권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사하듯 사뭇 고백적으로 진술한다. 그러나 고백의 끝이 결국 닿는 곳은 의지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말도 있지만, 최근 수필문단 일각에서는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란 이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권 작가의 다수 작품도 글의 목적성 혹은 의지가 선명하여, '무언가를 쓰기 위해 붓을 든' 양세(樣勢)를 상당부분 관찰할 수 있다.

나의 글쓰기는 우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 매달린 글쓰기와 죄책감을 씻기 위한 자학적 글쓰기 그리고 아픔을 견디기 위해 골몰한 채 글을 써댓기에 내 개인의 삶에 몰두하고 천착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이쯤 되면 내게 있어 문학은, 무언가 늪에 빠질 때마다 나를 건져 올리고 싶은 '극복심리'가 작용했는데 그것은 글쓰기를 밧줄삼아 내 삶을 지탱하는 일이었다.
― <수필과 나> 부분

권 작가의 글은 자신의 내면 또는 병적인 사회 일면에 대해 아파하고 그것을 글쓰기로 치유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글 속에서는 비판과 성찰, 자책과 자위, 상실과 극복의 함수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삶도 복숭아처럼 달콤한 열매일수록 사람들을 포기하게 만드는 벌레가 숨어 있다. 최상급의 맛일수록 먹기는 좋겠지만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고생을 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단지 게으름 때문에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단련을 하지 못해 늘 덜 익은 복숭아 맛의 삶을 거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숭아를 존경한다> 부분

책 제목 ‘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도 좀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시집이나 수필집은 수록작품 중 한 작품에서 제목을 따오기 마련인데, 이 책은 수록작품에서 제목을 따지 않았다. 그런데 '붉은 포도밭'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다분히 사색적이지만, 그 해석은 아무래도 독자의 몫이리라.

권남희 수필가는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과학교육과를 졸업 후 중등교사를 지냈다. 1987년 《월간문학》을 통해 수필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이래 현재 월간《한국수필》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수필집으로 『미시족』, 『어머니의 남자』, 『시간의 방 혼자 남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독서논술지도 전문가로서 독서논술 사이트 119study.com을 공동창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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